시험관아기시술(IVF)을 위해 어렵게 난자를 채취했지만 수정조차 시도하지 못한 채 폐기되는 경우가 있다. 의료진은 이를 ‘고사난자(Degenerated Oocyte)’라고 부른다.
이미 생명력을 잃어 수정 능력을 상실한 난자다. 난임 치료를 받는 여성들에게는 가장 허탈한 결과 가운데 하나지만 그동안은 “나이가 많아서 그렇다”거나 “난자의 질이 좋지 않았다”는 짧은 설명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왜 어떤 난자는 채취되기도 전에 생명력을 잃는지에 대해서는 생식의학에서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최근 세계 의학계는 그동안 버려졌던 이 고사난자에서 난임 치료의 새로운 해답을 찾기 시작했다. 연구의 초점도 ‘배아를 어떻게 잘 만들 것인가’에서 ‘난자는 왜 죽는가’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과거 생식의학은 고사난자의 가장 큰 원인을 여성의 연령으로 설명했다. 실제로 나이가 증가할수록 난자의 염색체 이상이 늘고 수정률과 임신율이 감소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 연구들은 단순히 노화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잇따라 보여주고 있다. 지금 가장 주목받는 것은 세포 속 발전소로 불리는 미토콘드리아다. 난자는 우리 몸에서 가장 많은 미토콘드리아를 가진 세포이며 수정 직후 배아는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난자가 저장한 ATP만으로 첫 세포분열을 시작한다.
그런데 미토콘드리아 기능이 떨어지면 ATP 생산은 감소하고 활성산소가 증가하면서 DNA 손상이 축적되고 결국 난자는 수정도 하기 전에 세포사멸(apoptosis)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 고사난자는 단순히 ‘늙은 난자’가 아니라 세포 에너지 시스템이 먼저 무너진 결과일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세계 생식의학계의 연구 방향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현미경으로 난자의 모양을 관찰하는 것이 전부였다면 이제는 난자의 대사 상태와 미토콘드리아 기능, 세포골격, RNA 발현, 대사체까지 분석해 생존 가능성을 예측하려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난자와 배아의 형태를 분석하고 착상 가능성을 예측하는 기술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연구자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수정이 이뤄지기 전에 “이 난자는 건강한 배아로 성장할 수 있는가”, “이 난자는 이미 퇴행이 시작된 것은 아닌가”를 미리 판단하는 것이다. 생식의학의 패러다임이 배아 중심에서 난자 자체의 건강성을 정밀하게 평가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국내 난임 전문가들도 같은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IVF 30년차 이상인 시니어 난임의사들은 “앞으로는 난자를 몇 개 채취했느냐보다 살아 있는 난자를 얼마나 확보했느냐가 훨씬 중요해질 것”이라며 “난소기능 저하 환자에서는 초음파상으로 난포가 잘 자란 것처럼 보여도 실제 채취한 난자 가운데 이미 퇴행이 진행된 경우를 적지 않게 경험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환자들은 채취 개수에 희망을 걸지만 임신 가능성을 결정하는 것은 난자의 숫자가 아니라 생존력과 세포 기능”이라고 강조했다.
고사난자가 많이 발견되는 환자군도 조금씩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고령 여성뿐 아니라 난소기능저하(DOR), 조기난소부전, 심한 산화스트레스, 비만이나 대사질환이 있는 경우, 과배란 자극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은 경우에서 고사난자가 상대적으로 많이 나타난다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난소기능이 저하된 여성에서는 어렵게 자란 난포 안에서도 난자가 충분한 에너지를 확보하지 못해 채취 시점에는 이미 생명력을 잃은 상태인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난포의 개수와 실제 임신 가능성이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고사난자를 다시 살리는 치료법은 없다. 세계 각국에서는 미토콘드리아 기능을 개선해 난자의 생존력을 높이기 위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코엔자임Q10(CoQ10), 멜라토닌, DHEA와 같은 항산화 물질을 이용한 연구가 이어지고 있으며 환자별 난소 상태에 맞춘 과배란 자극법과 난자의 대사 환경을 개선하는 전략도 개발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치료들은 일부 환자에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직 모든 환자에게 적용할 수 있는 표준 치료로 인정받은 단계는 아니다.
국제 연구진은 앞으로 난임 치료의 경쟁력이 더 많은 난자를 채취하는 기술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난자를 미리 선별하고 죽지 않도록 보호하는 기술에서 결정될 것으로 전망한다.
독일 막스플랑크 다학제과학연구소를 비롯한 세계 연구기관들은 인간 난자의 세포분열 과정과 미토콘드리아 기능, 노화 기전을 규명하는 연구를 잇달아 발표하며 난자의 생존력이 향후 난임 치료의 핵심 변수가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때 고사난자는 배양실에서 조용히 폐기되는 실패한 난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세계 의학계는 그 죽은 난자 속에서 난임 치료의 미래를 읽고 있다.
왜 어떤 난자는 수정도 하기 전에 생명력을 잃는지, 그 과정을 이해하는 순간 반복되는 시험관아기 시술 실패를 줄이고 더 건강한 난자를 지키는 새로운 치료의 길도 함께 열릴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