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경구 피임약에 대해 임신을 피하기 위해 먹는 약이라고 알고 있다. 맞는 말이다. 임신을 원하지 않는 여성이 생리 초부터 매일 한 알씩 복용하는 경구용 호르몬제다. 하지만 피임약은 피임만을 위한 약이 아니다. 피임 외에도 다양한 약효가 있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다양한 이유로 환자에게 피임약을 처방한다. 한마디로 호르몬 치료제의 일환으로 피임약을 사용하는 것이다. 첫째, 다낭성난소증후군 등으로 불규칙한 생리주기 혹은 희발월경(생리주기 35∼40일 이상), 무월경인 경우다. 경구 피임약을 복용함으로써 정상적인 생식 사이클을 회복할 수 있고 매달 생리를 하게 된다. 언젠가 생리를 하지 않아 걱정이라며 딸을 데리고 병원에 온 아빠가 있었다. 중국에 유학을 보냈더니 이제는 아예 생리를 하지 않는다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딸이 중국에서 끼니도 거르고 스트레스로 인해 체중까지 줄어들었다고 했다. 골반 초음파 검사를 해보니 자궁도 작아졌고 난소는 보이지도 않았다. 먼저 끼니를 거르지 않고 체중을 1~2kg 늘리라고 하면서 피임약을 처방했다. 1년이 지난 뒤 다시 병원에 왔을 때는, 딸아이는 얼굴이 밝아졌고 체중도 2kg 정도 늘었으며 생리도 꼬박꼬박 하게 됐다고 했다.

무월경인 여성 중에는 터너증후군인 경우가 있다. 터너증후군이란 성염색체 이상으로 생기는 장애인데, X염색체가 하나밖에 없어 난소가 생기지 않는다. 이들은 난소가 없어서 노화가 빨라질 수 있으므로 초경 때부터 피임약을 쓰기 시작해야 한다. 자궁은 있기 때문에 꾸준히 호르몬을 복용하면 자궁이 어른 크기가 되며 다른 사람에게서 난자를 제공받으면 임신도 할 수 있다.

둘째, 난소의 종양이나 초기암으로 난소를 모두 제거했을 때다. 난소가 없으면 난자도 없고 배란도 없다. 즉 에스트로겐 제로 상태가 된다. 이런 여성이라면 터너증후군 여성처럼 피임약을 계속 복용하는 것이 좋다.

셋째, 생리혈이 너무 많을 때도 피임약은 도움이 된다. 내막이 두꺼울수록 월경량이 많아지는데 피임약을 쓰면 내막이 상대적으로 얇아져서 월경량이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넷째는 조기 폐경 여성 혹은 폐경기 여성이다. 폐경은 난소의 기능이 저하되고 난자가 고갈된 상태를 말한다. 난자가 없으니 에스트로겐(E2)이 분비될 리 만무하다. 하지만 피임약으로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을 생식 사이클에 맞게 공급받는다면 노화와 갱년기를 좀 더 늦출 수 있다. 폐경이 된 여성에게 호르몬 투여를 시작하게 된 것도, 몇몇 의사에 의해 60세 전후 여성 중 또래에 비해 젊음을 유지하는 이들의 상당수가 피임약을 복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다. 물론 이 경우에는 일반적인 피임약보다 낮은 용량을 처방하는데, 이 역시 광범위한 의미에서 피임약 요법이라 볼 수 있다.

피임약을 둘러싼 연구 결과는 다양하다. 경구 피임약을 5년 복용할 때마다 자궁내막암 위험이 약 25%씩 줄어든다는 보고(영국 옥스퍼드 의대/2015)가 있는가 하면, 피임약을 통해 공급받는 에스트로겐(E2)이 신체 면역계를 증강시켜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대응력을 키우고 헤르페스 성병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캐나다 맥마스터 대학 연구팀/2016)도 있다. 반면, 피임약이 우울증 위험을 높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덴마크 코펜하겐 대학 의대/2016)와 폐경기 여성들의 호르몬 대체 요법(이하 HRT)이 유방암 발병률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영국 옥스퍼드 의대/2019)도 나온 바 있다.